코로나 엔데믹 영향에…지난해 운수업종 매출 19.8% ↑
해외 학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군국주의 일본을 중심으로 하여 국제질서가 재편되었건만.함께 해석되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문제는 근대적 지식인들이 일본의 근대화가 민주주의적 개혁의 길이 아닌 군국주의의 길이라는 점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다.무엇보다도 시모노세키 조약의 1조는 이러한 주장을 무색하게 한다.김옥균의 생각은 루쉰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해답은 하나에 있지 않다.근대화의 실패가 식민지화와 반(半)식민지화를 야기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대신 세계무역기구나 국제통화기금의 규칙을 따르면서 미국이 중심이 된 안보체제 안에 있어야 하는 조건이 있었다.
숱한 요인 얽혀 일본 책임론.아울러 1894년 동학농민 전쟁 때 일본의 대규모 파병과 함께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 개입했다는 일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해준다.
여기에는 당시 조선 정부와 개화파 지식인에 대한 평가가 그 핵심에 있었다조선이라는 나라는 선비의 나라였다.
공허한 공유(空儒) 등 못된 선비도 많다고 했다.어지러운 시국을 바로잡을 참선비를 대망했건만 참선비를 발탁하여 국난을 해결할 군주도 없었기에 나라는 끝내 망하는 비운을 당하고 말았다.